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드레스덴 폭격 (문단 편집) == 폭격의 진행 사항 == 2월 13일 최초의 폭격은 미 육군 항공대가 실시했으며 이때는 이미 도심 근처의 철도 시설을 두 번이나 폭격한 뒤였다. 당시 미군의 폭격 목적은 또 다시 이 철도 시설을 폭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월 14일의 주간 날씨가 좋지 않자 대부분의 폭격 작전이 취소되었고, 영국군에게 턴이 넘어갔다. 좋지 않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영국 공군의 폭격은 이루어졌는데 날씨 때문에 적어도 두 번은 때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결국 3시간차를 두고 두 번의 폭격이 행해졌고 이 덕분에 첫 번째 폭격에 놀라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있었을 때, 그리고 도시에서 폭격을 맞은 피해를 복구하고 사람들을 구조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을 때 또다시 맞게 되어 피해가 가중되었다. 이외에도 주변의 공장 지대를 폭격하는 작전이 그 날 야간에 이루어져 독일 공군의 혼란을 일으키는 효과를 기대했다. 첫 번째 폭격시 주로 피격당한 곳은 오스트라게헤게 운동장이었는데 이 곳은 구도심과 근접한 곳이었고, 이 구도심은 런던의 도심이 그랬듯이 나무 판자 건물이 많았던지라 엄청난 화재로 피해를 입었다. 폭탄 탑재량의 60%에 달했던 소이탄이 큰 피해를 준 것이었다. 이들을 '[[쿠키]]'나 '[[블록버스터]]'[* 한 블럭을 날려 버릴 만한 위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이 단어는 '블록버스터 영화'의 어원이 되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로 불렀다. 폭격의 시작은 22:00시 밤중이었다. > 도저히 묘사할 수가 없다! 폭발하고 또 폭발. 제일 암울했던 악몽보다 더 나빠서 믿을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끔찍하게 불에 타고 부상을 당했다. 점점 호흡하기가 힘들어졌다. 밖은 어두웠고 우리들은 상상조차 못할 공포감에 이 지하 창고를 빠져나가려 애썼다.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은 짓밟혔고, 짐들은 버려지거나 우리들 손 밖을 빠져나가 구출하는 사람들이 낚아채갔다. 우리 쌍둥이 아기들은 바구니 속에 넣어 젖은 옷들을 그 위에 덮어 엄마가 손으로 움켜쥐었고, 우리는 뒷사람들에게 밀려 위층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거리가 불에 타는 모습과 떨어지는 잔해, 끔찍한 화염폭풍을 지켜보았다. 우리 엄마는 물통에서 찾아낸 젖은 담요와 코트로 우리를 감쌌다. 우리는 끔찍한 것들을 보았다. 조그만 아이 크기만큼 타버린 어른 시체, 팔다리 조각들, 죽은 사람들, 불타서 죽은 일가족들, 불타면서 저편으로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 피난민 시체들로 가득 들어있는 불탄 사륜마차, 죽은 구조원들과 병사들, 자기 자식과 가족을 부르거나 찾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불이 어디든 났다는 것, 어디든지 불났다는 것, 그리고 화염폭풍의 뜨거운 바람이 불타는 집에서 탈출해 나왔다가 다시 돌아가려는 사람에게 불어닥치는 모든 순간. 나는 이런 끔찍하고 세세한 것들을 잊을 수 없다.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 — 생존자 중 한 명인 로타르 메츠거의 증언 > 내 왼쪽에서 갑자기 한 여자가 나타났다. 나는 그 여자를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앞으로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팔에다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그것은 아기였다. 그녀는 달리다가 넘어졌고, 그 아이는 그대로 아치 문 안의 불속으로 날라갔다. 갑자기 나는 내 오른쪽에서 다시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겁에 질렸고 손짓으로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으며, 그 다음 — 나는 공포를 느끼고 경악했다 — 나는 그들이 스스로 순서대로 하나씩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훗날 그 불쌍한 사람들이 산소 부족으로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졸도했고 곧 불에 타서 재로 변해버렸다. 나는 때때로 미치도록 두려울 적마다 다음과 같은 간단한 문장을 반복하고 새뇌긴다: "나는 불에 타서 죽지 않았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모른다. 나는 오직 한 가지만을 안다. 나 스스로 타죽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 생존자 중 한 명인 마거렛 프레예 이후 2월 14일 아침, 미군의 8공군에서 주간 폭격을 위해 출발했다. 이들은 도시 이외에도 주변의 소도시들(주로 공업 지역)을 목표로 출발했다. 일단 도시를 폭격하는 그룹은 도심의 철도 시설을 폭격하기로 했으나 날씨가 흐리면 도시는 놔두고 공업 지역을 폭격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만일 둘 다 여의치 않으면 도심을 폭격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미군의 폭격 또한 영국군과 비슷하게 총 폭격량의 40%가 소이탄이었다. 결과적으로 철도 시설에 대한 폭격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나 공장 지역에 대한 폭격은 기상 악화로 도심에 대충 폭탄을 버리고 오게 되었다. 물론 연합군도 H2X레이더를 사용해 적절한 지상물을 찾기는 했으나 걸음마 단계 기술이었으니만큼 정확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당시 혼란을 가중시키기 위해 호위 전투기들에게 도심 근처의 도로에 무차별 기총소사가 명령되기도 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확인된 바는 없고, 무엇보다도 주장하는 사람이 홀로코스트 부인론자인 데이비드 어빙(David Irving)이라서 신뢰성은 더 떨어진다. 게다가 일단 독일측 목격자부터가 이런 일은 없었다고 밝혔다. 2월 15일에는 비로소 가장 주된 목적이었던 뵐렌(Böhlen) 합성유 공장을 폭격하려고 했으나 이 또한 구름 때문에 막혀 '[[일본을 공격한다|드레스덴을 공격한다]]'가 되어버렸다. 다만 이때도 구름이 짙게 끼어 버려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근교에 대충 떨구고 귀환했다. ~~그러니까 미군은 철도 시설 폭격한 거 빼면 아무데나 폭탄 던지고 돌아온 거 밖에 없다.~~[*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인 <10대 사건으로 보는 2차 대전>에는 철도나 군수 공장을 폭격해야 독일 군수 산업을 마비시킬 수 있는데 이것들보다 주택 단지를 최우선 공격 목표로 삼은 영국 공군을 비판하는 역사가가 나온다.] 드레스덴에 떨어진 폭탄 통계 || 날짜 || 목표물 || 군세 || 항공기 수 || 고폭탄(톤) || '''소이탄'''(톤) || 총 톤수 || || 1944년 10월 7일 || 철도 || 미8공군 || 30 || 72.5 || 없음 || 72.5 || || 1945년 1월 16일 || 철도 || 미8공군 || 133 || 279.8 || 41.6 || 321.4 || || __'''1945년 2월 14일'''__ || '''도심''' || '''영국 공군''' || '''772''' || '''1477.7''' || '''1181.6''' || '''2659.3''' || || 1945년 2월 14일 || 철도 || 미8공군 || 316 || 487.7 || 294.3 || 782.0 || || 1945년 2월 15일 || 철도 || 미8공군 || 211 || 465.6 || 없음 || 465.6 || || 1945년 3월 2일 || 철도 || 미8공군 || 406 || 940.3 || 140.5 || 1080.8 || || 1945년 4월 17일 || 철도 || 미8공군 || 572 || 1526.4 || 164.5 || 1690.9 || || 1945년 4월 17일 || 산업지역 || 미8공군 || 8 || 28.0 || 없음 || 28.0 || 즉 폭탄을 떨군 양으로 따지면 미군의 폭격만으로도 가공할 만한 위력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먼저 영국 공군이 떨어뜨린 소이탄의 연기 때문에 기상 상태가 좋지 않아 제대로 맞지 않았고, '''드레스덴을 결정적으로 파괴시킨 건 영국 공군의 야간 폭격 때 떨어진 [[소이탄]]이었다'''. 대량의 소이탄 폭격으로 [[드레스덴]] 전체에 대규모의 화재가 발생했으며 장소에 따라 고온에 따른 화염 폭풍까지 발생했다. 이로 인해 방공호 등지에 대피했던 민간인들 중 상당수가 희생당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방공호 자체가 단 하나밖에 없었고 관리도 허술했다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제대로 방호가 될 리 없는 지하실에 숨어드는 사례가 보통이었다. 이 지하실들은 건물마다 얇은 벽으로 막혀 있어 한 건물이 무너질 것 같으면 벽을 뚫고 다른 건물로 옮기는 방식이었는데 이 탓에 훗날 희생자들의 시체가 한 곳에 우르르 쌓여 있게 되었다. 또 폭격 당시 미 육군항공대나 영국 공군의 폭격기 손실은 고작 7기([[B-17]] 1기, [[아브로 랭커스터|랭커스터]] 6기)가 전부였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일단 폭격 시점이었던 1945년에는 루프트바페가 궤멸 직전이었기 때문에 도시에는 요격기들이 일체 배치되어 있지 않았고, 대공포들과 방공시설도 모조리 동부 전선의 소련군을 막으려 옮긴 관계로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쾰른이나 함부르크, 브레멘 등 산업적 가치가 높은 곳이라면 대공포나 요격기들이 상시 배치되었지만 그 정도 규모가 아니었던 드레스덴은 그렇지도 않았다.] 그나마 공습 당시 인근 비행장에서 28기의 [[Bf 110]] 야간전투기들이 출격했고, 드레스덴에 배치되었던 소수의 대공포대들이 저항했지만 전술했듯이 공습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